1. 새로운 항구, 싱가폴! 200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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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제국은 18세기 중반부터 이미 인도에 진출했으며 싱가폴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중국산 차와 염료, 도자기들을 원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이와 같은 필요에 의해 제품들을 보다 빠르고 값싸게 만들어낼 공장들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영국은 인도와 중국간에 더욱 빈번한 항해를 하게 되었으며, 그 항해는 아주 긴 시간이 소요되었기에 선박들은 물과 식량, 연료 그리고 수리 등을 위하여 머물만한 중간 지점이 필요하기에 이르렀다. Francis Light는 바로 그러한 적당한 항구를 찾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페낭을 적합한 장소로 생각하였고 곧이어 동인도회사는 1786년 페낭에 항구 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영국은 페낭은 너무 북쪽에 있으며 새로운 물품들을 구입하기에는 인도와 너무 가깝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이 지역에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영국은 네덜란드와 경쟁할 만한 새로운 항구를 찾아 나섰다. Stamford Raffles는 그때 새 항구를 찾는 임무를 띄고 나선 사람이었고 그는 여러 지역을 탐험한 끝에 결국 싱가폴에 도착했다.
산스크리트어인 'Singapura'라는 이름은 '사자의 도시'를 의미한다. 여기에 관련된 이야기는 12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299년에 수마트라에 우타마라는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리오섬까지 항해하기를 원했다. 배가 Temasek 근처에 이르렀을 때 거센 풍랑이 일었다. 배에 물이 들어오고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는데 왕자가 그의 왕관을 바다물 속에 던지자 풍랑이 잠잠해졌다. 그때 한 섬 해안 근처에서 왕자는 숲 속으로 갑자기 뛰어드는 이상한 동물을 보았다. 곁에 있던 한 노인은 그것이 사자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고 왕자는 그 섬에서 머무르기로 결정하고서 섬의 이름을 Singapura로 지었다고 알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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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Stamford Raffles는 7월 6일에 태어났다. 런던에서 자란 그의 가정은 아주 가난했다. 14살 때 그는 동인도회사의 런던사무소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 거기서 그는 틈틈이 공부하면서 인도와 중국에 가볼 꿈을 키웠다. 1805년에 Raffles는 페낭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말레이언어와 말레이에 대해서 배웠다. 그는 말레이언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6년 후에 자바섬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거기서 그는 원주민들을 노예로 쓰지 못하도록 하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으며, 1818년에는 수마트라에 있는 조그만 무역 기지인 Bencoolen을 찾아냈다. 그러나 페낭과 Bencoolen은 두 곳 다 영국이 찾는 항구로는 적합하지 못했으며 Raffles는 영국에게 더 나은 항구를 찾아 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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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프레스 웹사이트에서 발췌한 자료입니다. 제174호 |
2. 래플스, 싱가폴에 도착 200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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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819년 1월 28일, 래플스와 윌리암 파커(William Farquhar)는 그들을 보호할 인도인 군인 몇 명만을 데리고 싱가폴에 도착했다. 섬의 추장 압둘라만(Temenggong Abdul Rahman)은 다음날 그들을 맞이하였다. 래플스는 추장과의 면담을 통해 싱가폴이 조호(Joho) 왕국에 속한 영토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조호의 늙은 왕이 죽자 그의 두 아들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놓고 권력다툼이 있었고 네덜란드는 둘째 아들을 조호의 왕으로 세워 그 대가로 리오 섬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파악한 래플스는 곧 큰 아들이 조호의 진정한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를 싱가폴로 초대하였다. 1819년 2월 6일, 그들은 큰 아들을 조호의 진정한 왕으로 선포하는 성대한 의식을 가졌고, 왕자에게는 술탄 후세인이라는 칭호도 함께 주어졌다. 래플스는 곧바로 압둘라만과 술탄 후세인 사이에 하나의 조약을 체결했다. 그 조약에 의하면, 영국은 술탄에게는 5천$, 추장인 압둘라만에게는 3천$을 매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그 대가로 영국은 싱가폴에 무역기지를 세울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래플스가 처음 싱가폴에 도착했을 때는 볼거리가 별로 없었다. 현재 차이나타운이 있는 자리는 대부분이 늪지대였고 강둑에는 오두막과 집들이 늘어서 있었으며 그 중 가장 큰집은 추장인 압둘라만의 집이었다.

네덜란드는 래플스가 한 행위에 대해서 매우 화가 났다. 그들은 싱가폴은 그들의 영토이며 영국은 싱가폴에서 즉각 떠나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런던에 있는 영국 정부에 이러한 사실을 담은 서신을 보냈다. 그 당시에 편지가 유럽에 도착하는데는 약 일년이 걸렸다. 그래서 이러한 서신상의 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는데 이기간은 싱가폴이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영국 정부는 싱가폴에서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서 그 곳 무역기지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앵글로-더치 조약'에 사인해 동남아시아를 두 지역으로 나누기로 했다. 영국은 싱가폴을 갖고 네덜란드는 말라카와 말라야의 남은 지역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 대가로 영국은 Bencoolen과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에게 내주었다.
싱가폴 강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1840년에 폭파되었다. 바위에는 어느 누구도 읽을 수 없는 말이 새겨있었다. 그것은 그 바위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에 관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Raja Vikrama(1347-1362)가 싱가푸라의 왕이었을 당시 이곳에는 바당(Badang)이라는 이름의 힘센 장사가 살고 있었다. 인도의 한 왕은 장사 한 명을 바당과 겨루게 하기 위해 싱가푸라로 보냈다. 왕궁의 근처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바당은 그 인도인 장사에게 그 돌을 던져보라고 권했다. 그는 겨우 그 돌을 들어서 50cm 정도 옮겼다.
그러나 바당은 그 돌을 가볍게 들어서 싱가폴 강의 입구에까지 던져버렸다. 인도 왕은 이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바당이 죽었을 때 그를 그 바위 근처에 묻어주었고 두 개의 돌기둥을 보내서 바당의 무덤 위에 세웠다. 그 바위는 그 돌기둥의 잔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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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전의 시작, 도시계획
2003-11-10

래플스가 싱가폴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직 Bencoolen이 필요했기 때문에 싱가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는 윌리엄 파커 대령을 싱가폴에 이주시켜 그가 싱가폴을 관리하도록 했다. 두 번째 정착민인 죤 크로퍼드에게 래플스는 법을 만들고 무역과 도시에 관한 계획을 조심스럽게 구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824년에 체결된 앵글로-더치 조약에 의해 영국은 Bencoolen을 네덜란드에게 주고 말라카를 확보하게 되었다.
1825년 이후로 영국의 세 무역항구 말라카, 싱가폴, 페낭은 Straits Settlements로 불렸다. 이 무역항들은 총독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관리했는데 그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동인도회사에서 싱가폴로 파견한 사람이었다. 1858년 이 회사가 문을 닫았을 때 총독은 'India Office'라는 보고서를 작성해서 런던에 보고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 도 이 India Office는 싱가폴의 상업적인 가치에만 집중한 것이라서 싱가폴을 개발하거나 해적을 물리치는 것 들에 대한 문제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한편 말레이반도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었는데 싱가폴에 있는 상인들은 그것이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싱가폴에 있는 사무실을 런던에 있는 식민사무소로 이전하기를 바랬는데 결국은 1867년에 그렇게 되었다
정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윌리엄 파커 대령은 야신이라는 상인을 감옥에 넣은 일이 있었다. 이유는 야신이 물건을 사고도 그 상인에게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투옥된 야신은 무척 화가 났고 복수를 계획했다. 어느 날 밤, 그는 빚을 갚기 위해서 한 상인의 집을 방문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자 그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 상인은 야신이 자기를 죽이려는 줄을 알고서 파커에게 도움을 청했다. 파커는 몽둥이를 가지고 그 상인의 집으로 달려갔고 파커를 칼로 찌르고 도망가려 하던 야신은 파커의 아들과 그의 인도인 군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죤 크로퍼드는 1823년에 싱가폴에 이주했는데, 1년 후에 그는 술탄 후세인과 추장 압둘라만과 함께 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은 동인도회사에 싱가폴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주는 것이었다. 크로퍼드는 조그만 재판소를 설치해 재판을 시작했고, 나무로 된 다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Elgin Bridge이다. 그는 1826년에 싱가폴을 떠났다. 1862년에 그는 런던에 있는 식민사무소가 싱가폴에 대한 무역과 법률에 관한 통치권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영국 국회로 보냈다.

1822년, 래플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싱가폴에 왔다. 그는 싱가폴이 그가 기대했던 대로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도시계획을 다시 시작할 것을 결심했고, 도시와 도로에 대한 세부적인 계획들을 세워나갔다. 집과 창고에 대한 측정까지 한 다음에 그는 Esplande라는 넓은 광장에 공공건물을 세우우기로 계획했다. 그는 상인들에게 그들의 창고를 강의 서쪽 강둑(선창지역)에 지으라고 지시했고, 창고 뒤편에는 중국인들이 창고를 지을 수 있게 했다. 영국인들은 Beach Road에 집을 짓도록 했고, 아랍과 말레이인, 인도인들에게도 그들의 지역을 지시해 주었다. |
출처 : Tong - 화려한 飛上™님의 해외여행/정보통